스가오이/프로젝트 9086
밖이 파래지면 하는 일은 항상 똑같았다. 나는 항상 앞이 훤히 보이는 벽 안에 갇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며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일 때마다 감탄하며 종이 위에서 바쁘게 펜을 움직였다.
그 중에서 꼭 한 사람은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뒤에 서서 내 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며 열심히 무언가를 쓸 때, 그는 항상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사람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해서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어느 날은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평소와 같이 나를 보며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없어서 나는 문 쪽만 바라보며 하루 종일 그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랗던 밖이 까매지고 나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야 그 사람은 나타났다.
아무도 없을 때 나타난 그 사람은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뒤에 숨긴 것이 그 사람의 허리춤에나 겨우 닿는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작은 사람은 그 사람의 옷자락을 꼭 잡은 채 숨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크고 동그란 눈이 예쁘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쭈그려 앉아 있는 내게 시선을 맞추며 허리를 숙인 그 사람은 살짝 웃음지었다. 그 사람의 표정이 바뀌는 것은 처음 봤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내게 그 사람이 이야기했다.
“친구를 데려왔어.”
“친구가 뭐야?”
친구라는 것은 처음으로 들어 본 말이었다. 이 곳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명도 그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 사람은 마저 이야기했다.
“그건 이 애랑 같이 있으면 알게 될 거야.”
그 사람은 재촉하듯 작은 사람을 밀었다. 작은 사람은 우물쭈물하며 걸음을 떼어 내 앞에 와 섰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었지만, 앞이 가로막혀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런 내 사정을 알았는지, 그 사람은 벽 쪽으로 다가가 뭔가를 눌렀다. 그러자 눈 앞이 보이는 벽이 천장으로 올라가며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그 작은 사람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내 앞으로 다가온 작은 사람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그렇게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 봐서 작은 사람이 하는 양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입을 우물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리던 작은 사람은 한 손을 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안녕...”
작은 사람의 인사에 나는 환하게 웃었다. 내가 웃는 것을 본 작은 사람은 긴장이 풀린 것인지 따라 웃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가슴 속이 이상한 것 같았다. 내 앞에 앉아 눈을 마주친 작은 사람은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이름이 뭐야?”
“이름?”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작은 사람도 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와 작은 사람을 본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얼른 입을 떼었다.
“그 애 이름은 코우시야.”
“코우시?”
“응. 스가와라 코우시.”
그 사람이 알려준 단어를 몇 번 중얼거린 작은 사람은 다시 나를 보곤 이름이 코우시구나, 하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게 뭐냐고 되물어 보려다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던 작은 사람은 자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토오루. 오이카와 토오루야.”
내가 나지막하게 토오루, 하자 작은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나는 토오루라는 단어의 울림이 퍽 마음에 들어 계속 중얼거렸다. 토오루, 토오루, 토오루. 아마도 이름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쓰이는 것 같았다. 벽을 벽이라고, 바닥을 바닥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아마 작은 사람의 이름은 토오루겠지. 그렇다면 내 이름은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코우시가 되는 건가.
토오루는 내 앞에 앉아 한참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 그 사람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고, 나는 토오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내가 아는 말들은 많은 편이 아니라서 토오루의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더 많았지만 그 긴 시간동안 한 번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 사람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토오루가 또 다른 이야기를 생각해 낼 무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사람은 이제 가야 된다고 했고, 토오루는 눈에 띄게 아쉬운 얼굴을 했다.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토오루가 더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은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토오루의 마음을 안 것인지, 그 사람이 한 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추곤 토오루를 봤다.
“왜, 가기 싫어?”
그 사람의 말에 토오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난 뒤 자꾸만 내 쪽을 돌아 보았다. 토오루를 따라 나를 본 그 사람은 아주 살짝 웃으면서 토오루에게 말했다.
“토오루가 내일 하루동안 아빠 말을 잘 들으면 또 코우시를 만나게 해 줄게.”
“진짜요?”
“진짜.”
그 사람의 말에 조금 고민하던 토오루는 알았어요, 아빠 말 잘 들을게요, 했다. 그 사람은 다시 벽 쪽으로 가서 아까 눌렀던 것을 다시 눌렀다. 그러자 사라졌던 앞이 보이는 벽이 다시 생겨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되었다. 그런 나를 보며 토오루는 손을 흔들었고,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그 날로부터 시작된 한 밤중의 만남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나보다 작았던 토오루는 이제 내 쪽에서 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컸고, 그만큼 그 사람도 늙어서 얼굴에 주름이 늘었다.
그 동안 토오루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토오루가 가르쳐주는 단어의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더욱 많아졌다. 내가 있는 곳이 연구실이라는 것과 매일 나를 보며 뭔가를 분주히 적어 내려가는 사람들을 연구원, 그 중에서도 그 사람은 박사라고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을 오이카와 박사라고 부르고, 이 연구실의 총 책임자라는 것도 토오루가 가르쳐 주었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연구원들은 나의 변화에 놀라워했고, 경이로워했다. 나는 토오루를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고, 그럴 때마다 토오루는 어색하게 근육을 끌어 당겨 웃었다.
연구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혼자 무료하게 앉아 시간을 보낼 때,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는 조금 굳은 얼굴의 토오루였다. 웬일로 혼자서 온 것에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토오루는 벽 쪽으로 다가가 유리 벽을 올렸다. 진동 소리와 함께 벽이 천장으로 사라지면 토오루가 척척 다가와 내 앞에 주저 앉았다. 토오루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고, 나는 토오루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물어보려다 그냥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오루가 입을 떼었다.
“... 있잖아, 코우시.”
“응.”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그런 생각 안 들어?”
토오루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굳이 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시간만 되면 꼬박꼬박 밥도 챙겨 주고, 조금 지루한 것을 빼면 특별히 불편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이 곳이 아니면 토오루와 만나지도 못 했을 것이니까.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나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해 본 적 없어.”
“... 왜?”
토오루의 물음에 나는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으며 토오루의 얼굴은 일그러져 갔다. 그 얼굴은 그래, 처참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토오루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 팔을 잡았다. 나보다 키도, 덩치도 훨씬 큰 토오루였지만 덜덜 떠는 모습은 어쩐지 나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이어서 들려 온 토오루의 목소리는 그 몸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코우시...”
“토오루?”
“사람이라면, 나가고 싶은 게 정상인 거야...”
그리고 고개를 든 토오루는 왜인지 울고 있었다. 토오루가 우는 것은 처음 봤다. 다른 사람들이 울 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었는데 토오루가 울어버리니 어쩐지 나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나는 그저 내 팔을 잡고 우는 토오루가 울음을 그치기만을 바랐다. 한참을 울던 토오루는 곧 눈물을 문질러 닦고 나를 보며 말했다.
“나가자.”
“어?”
“어디라도 좋으니까 여기서 나가자. 그래서,”
네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 불분명하게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며 토오루는 다시 울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가만히 토오루를 안았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토오루는 옷자락을 잡고 조금 더 울었다. 토오루가 흘린 눈물이 옷에 스며들어 축축해졌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토오루는 금방 울음을 멈췄고, 나는 조금 걸리던 것을 토오루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 책임자는 토오루네 아버지 아니야?”
“상관 없어.”
“어째서?”
“아버지는 옛날부터 너를 이렇게 가두고 있었잖아.”
그런 아버지라면 내가 싫어. 네가 여기서 나가고 나면, 나는 다신 아버지를 안 볼 거야. 토오루는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내 손을 꽉 잡은 토오루는 나와 눈을 맞추며 다시 말했다.
“내일 밤이야.”
“......”
“이 연구실을, 꼭 빠져 나가자.”
“그래서 도망쳤다구요?”
“어. 감시 카메라도 교묘하게 피해 갔어.”
“오이카와 박사님 아들답네요.”
“그나저나 박사님은 어떡해요? 귀여운 아들이랑 연도 끊고.”
“상관 없네. 그 덕분에 연구는 성공했으니까.”
“그나저나 ‘그것’도 대단하네요. 설마 남자한테...”
“그게 더 성과 아니야? 우리는 단순한 ‘사랑’만을 원한 건데 그 대상이 같은 남자라니.”
“다음 세미나 기대되네요. 못 믿는 건 아니겠지.”
팔락거리며 넘어가던 서류를 정리한 막내 연구원은 그것을 잘 갈무리 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문을 나섰고, 오이카와 박사는 책상 위에 있는 서류의 맨 앞장을 조용히 보다가 따라서 문을 나섰다.
‘프로젝트 9086 - 사랑을 대상으로 한 로봇 감정 연구.
대상 : SWK – 0613(스가와라 코우시). 결과 : 성공.’
이번에 오이카와 생일 기념으로 올린 스가오이 글에는 꽤 큰(편이라고 생각하는) 반전이 있는데,
사실 제목부터 어마어마한 스포일러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목이 '프로젝트 9086'인데,
글 모티브 자체를 affective computing라는 단어에서 따 왔음.
뜻은 '분위기나 감정과 관련된 신체적 특성을 감지하기 위해 생체인식 센서를 사용하는 컴퓨터 기술. 분위기 및 감정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해서 이걸 조금 꼬아서 제목으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a=1, b=2, c=3 하는 식으로 알파벳을 숫자로 변형시켰음.
그러면 affective는 1 6 6 5 3 20 9 22 5, computing은 3 15 13 16 21 20 9 14 7가 나옴.
affective의 숫자들끼리 더하면 77이 나오고 computing의 숫자들끼리 더하면 118이 나오는데
이 두 숫자를 곱한 수가 바로 9086임.
제목부터 어마어마한 스포일러가 맞음...ㅇㅇ
오이카와 생일 기념 합작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