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담이설 / 시작하는 이야기
2018년 6월 9일
무기력조 온리전 <오늘도 0%입니다>에 나오는 회지 샘플
귀신 보는 츠키시마를 비롯한 쿠니미, 켄마, 아카아시가 등장하는 이야기
뭐, 내 안경? 도수 없는 거 아니냐고? 맞아. 너 눈썰미 좋네. 나 눈 별로 안 나빠. 이건 장식이야. 도수도 없는 걸 왜 쓰고 다니냐고? 음, 그럼 나 어릴 때 얘길 해 줄게.
우리 엄마가 열심히 다니는 절이 있어. 그 절에 종종 형도 데리고 갔었는데 스님들이 워낙 예뻐하셔서 내가 걸어 다닐 수 있게 됐을 때, 나도 그 절로 데리고 갔었대. 그리고 엄마가 스님한테 인사를 하는데, 스님이 날 보자마자 아드님이 눈이 좋네요, 했다는 거야. 엄마 입장에선 당연히 무슨 소린가 하셨겠지.
그래서 앉아서 제대로 얘길 하는데, 난 소위 말하는 ‘이 쪽’ 사람들의 부류라는 거야. 그 중에서도 눈이 특별히 좋아서 사자(死者)들을 굉장히 선명하게 볼 수 있대.
엄마는 그 얘기 듣고 엄청 놀라셨지. 아빠 쪽은 물론이고 엄마 쪽에도 ‘이 쪽’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거든. 두 집안 통틀어서 처음으로 태어난 ‘이 쪽’ 사람이 나인 거야. 스님 얘기를 듣자마자 엄마는 내가 기어 다닐 때부터 아무도 없는 쪽으로 손을 뻗거나 했던 일이 생각나서 오싹했대.
그 뒤로 절에서 안경을 맞춰줘서 그거 쓰고 다니고 있어. 무슨 특별한 힘을 써서 만든 거라 그걸 쓰면 사자들이 보이지 않아. 내가 시야가 엄청 넓은 편이라 안경 테 바깥쪽으로도 여러 명이 지나가는 게 보여. 아, 지금 네 옆에도 한 명 있네. 그래도 다행히 목소리는 안 들려. 안경 벗고 있으면 그냥 컴퓨터 소리 꺼 놓고 동영상 보는 것 같아.
응? 불편하지 않냐고? 어릴 때부터 그런 건데 뭐….
-Kei Tsukishima
아, 잠깐만. 다른 데 가서 얘기하자. … 여기서 하자. 이제 좀 조용하네.
응? 아까 거기도 조용하지 않았냐고? 아, 내 귀 얘기를 안 했구나. 우리 집안, 대대로 ‘이 쪽’ 계열이어서 사자들 목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 대신 눈에 보이진 않아.
엄청 옛날에 조상님 한 분이 다친 새 한 마리를 돌봐 주셨는데, 그 새가 알고 보니 신님이었다더라. 그 신님이 조상님께 소원을 하나 들어 주신다고 하셨는데, 당시의 조상님은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남편분과 사별하신 상태였대. 그래서 신님께 남편분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지. 그런데 그 분은 남편분을 잃은 병으로…. 녹내장이었을거야. 아무튼 눈이 나빠지고 있어서 조금만 더 있으면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였어. 그래서 신님은 항상 그 분 곁에서 머물던 남편분을 보는 것 대신 목소리를 듣고 얘기 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이듬해 낳은 딸과 아들 쌍둥이는 그 분의 능력을 물려받아 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대. 쌍둥이 남매가 성인이 된 이후로 그 분과 쌍둥이 누나는 무녀가 됐대. 이게 우리 신사 전설이야.
듣기로는 능력은 아들들도 똑같이 물려받지만 딸들처럼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순 없다고 한다더라. 그 말대로 내가 초등학생 때 결혼한 사촌형네 딸은 그런 낌새가 전혀 없고, 우리 첫째 누나는 아이한테 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 지 가르치고 있어.
그래도 뭐, 눈에 보이는 것보단 들리기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사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제 존재를 알리려고 하거든. 내가 이런 귀를 가졌다는 게 알려지면 얼마나 귀찮겠어?
-Akira Kunimi
목소리를 작게 내는 것은 반쯤 습관이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언력(言力)을 다루는 일을 해 왔거든. 그래서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조심스럽게 해야 해. 소리라도 지르면 근처에 있는 사자들이 모두 최면에 걸린 것처럼 변해 버리니까.
언력은 사자들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야. 물론 죽은 사람들한테만 국한되는 건 아니야. 왜, 가끔 자기도 모르게 말을 고분고분 따르게 되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보다 언력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거야.
사자들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언력을 다루는 것이 뛰어나. 가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홀려서 죽게 만드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야. 사자들이 산 사람들보다 강한 언력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어. 아주 오랫동안 말이야.
하지만 단 한 번, 신님의 실수로 죽은 사람들보다 강한 언력을 가진 사람이 태어났어. 놀란 신님은 다시 그 힘을 되찾아 오려고 했지만 이미 그 사람은 자신의 언력으로 사자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게 만든 뒤였어. 그렇다면 신님은 차라리 그 힘을 좋은 일에 쓰라며 사자들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들을 수 있게 해 주셨어.
이게 우리 집안 전설이야. 그 사람의 후손들은 언력을 다룰 수 있고, 완전히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죽은 사람들을 분간할 수는 있어.
사자들을 보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 단순히 죽었을 뿐이지 우리와 같은 사람이잖아.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을 최대한 편하게 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
-Kenma Kozume
조금 늦었지? 미안. 미리 연락을 했어야 됐는데. 갑자기 일이 좀 생겼었거든. 무슨 일이었냐고? 아, 너한텐 애기 한 적이 없구나. 떠도는 사람들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 보내는 일이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여기저기 떠도는 사자들을 돌아가야 할 곳으로 보내는 일을 했어. 언제부턴진 몰라. 먼 옛날의 조상님이 딱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로 이 일을 하게 됐대.
그 분 말로는 갑자기 쓰러져서 죽었는데 그 곳을 지배하는 분에게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빌었고, 이를 가엾게 여기신 명계의 신께서 자식들까지 평생 그 일을 하는 대가로 살려주게 되셨대. 그 뒤로 이 일은 먼 후손인 나까지 이어받아서 하고 있어.
어릴 때는 이 일을 하는 사람이 꼭 필요한지 아버지께 여쭤 본 적이 있어. 당연히 엄청 혼이 났었지. 그 뒤에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가끔 자신이 죽은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해하려는 이들이 나온다는 얘기를 해 주셨어. 평범하게 떠도는 사람들은 사자들의 세계에서도 눈 감아 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로 문을 열어 돌려 보내야 한대.
방금도 그 일을 하고 왔어. 다만 강제로 돌려보내고 나면 기분이 찝찝할 수밖에 없어.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럴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아주 잠깐이지만 내 나름대로 명복을 빌고 있어. 그들도, 좋아서 죽은 건 아닐 테니까.
-Keiji Akaas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