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리퀘박스
*소재 주신 분 사랑합니다 저 멘트 보자마자 입 틀어막았어요
*취중연성주의
*약간 클리셰적인 소재입니다
언젠가 앨범 안에서 기어 다니지도 못 했던 시절의 사진을 본 적 있었다. 사진 속에서 잠들어 있는 내 옆에는 마찬가지로 기어 다니기도 전의 네가 자고 있었다. 사진을 보신 어머니는 바로 웃음을 터뜨리셨다.
-저 때 얼마나 웃겼는 줄 아니?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둘 다 엄청 울어댔어.
-에, 진짜?
-그럼. 그래서 일부러 바로 옆자리에 눕혀 놓은 거야.
어머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린 시절의 내 옆에는 항상 네가 있었다. 네가 옆에 없는 사진은 서너 장 건너 하나 있을까 말까 했다. 사진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어머니는 옆에서 그 때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한참 기어 다니다 너와 이마를 부딪혀 울음을 터뜨린 일, 걸음마를 갓 뗀 내가 너에게 같이 걷자며 손을 잡아 끌다가 넘어진 일, 비 온 뒤 물웅덩이에 넘어져 엉망이 된 나를 보고 너도 길바닥에 굴러버린 일. 그런 일이 있었나 싶어 황당하다가도 머리 속에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에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태어나자 마자 같이 있었으므로 너와 만난 지는 올해로 열 여덟 번째 해가 되었다. 너와 나는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을 앞둔 고등학교까지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너는 나의 청춘이 되었다. 항상 곁에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다가 느즈막히 깨달은 사실이었다.
언제가 시작이었는 진 모른다. 당연하다. 나는 그 사실을 중학교의 졸업을 앞둔 여름방학 때 깨닫았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개구리가 밤 새 울던 날, 나는 바로 옆 집에서 자고 있을 네 생각에 잠을 설쳤다. 그래서 다음 날에 네가 수수한 얼굴이 오늘은 못생겼다며 놀려 댈 때도 평소라면 날아갔을 주먹을 잠자코 꾹 쥐기만 했었다.
생각해 보면 배구를 시작한 이유도 너였다. 유치원 때와 달리 초등학생이 되자 너는 수업이 끝나면 바로 클럽 팀 활동을 하러 사라졌다. 어쩌면 나는 너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배구를 하고 싶다고 어머니께 조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클럽 팀 활동에 나왔던 날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던 너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생 때에는 내려다보던 코코아 빛 눈동자를 올려다보게 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였다. 그 때 쯤의 너는 키가 크고 얼굴도 잘생겨 져서 교내엔 너를 짝사랑하는 동급생 애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중에 몇 명은 너에게 전해달라며 내게 러브레터를 주기도 했고, 실제로 너는 그 중 몇 명과 사귀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앓이를 많이 했었다. 차라리 너와 나 둘 중에 한 사람이 여자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너는 여자친구와의 일을 내게 꼬박꼬박 얘기 해댔다.
-이와쨩 들어봐! 오늘 히카리쨩이,
-네 연애 담 같은 거 들어 줄 시간 없으니까 저리 가라.
네 얘기를 건성으로 넘기며 방 정리를 하면 징징대는 소리가 성가실 정도로 커졌다. 너의 연애담은 정말로, 듣기 싫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결국 반쯤 짜증 섞인 얼굴로 너를 보면 기다렸다는 듯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히카리쨩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자기랑 이와쨩 둘이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거냬!
-그래, 그래. 일단 나와 봐.
-그래서 당연히 이와쨩을 구한다고 했지! 그런데 엄청 화 내는 거야. 그래서 결국 헤어졌잖아.
그 때 너의 여자친구는 수영부였다. 같은 반 애들이 수영부 여신 남자친구라며 너에게 달려들어 헤드락을 걸기도 했었다. 그런 상황이면 아무리 수영선수라도 당연히 여자친구의 편을 드는 것이 맞지만 나라고 대답했다가 차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어졌다. 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눈썰미 좋은 네가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방 정리는 하지 못하고 너와 몸싸움을 하다 웃음을 터뜨렸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다만 너는 고등학교 입학 이후 숨 쉬는 것 하나까지도 부활동에 쏟아 부은지라 내 감정을 눈치 채진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고백 이후 지금까지 가져 왔던 친구 관계가 깨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일이었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다가와선 너 오이카와 좋아하냐, 하고 물었을 땐 정말로 심장이 철렁했었다. 파래진 내 얼굴을 보며 깔깔 웃어대던 녀석들은 너에게 말해버린다며 장난을 쳤고 나는 입을 다물어 주는 조건으로 치즈 햄버그와 슈크림을 바쳐야 했다. 혼자 연습을 하는 너를 두고 집에 오며 나는 너를 원망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챌 정도로 티가 나는데 너는 왜 몰라줄까. 아, 그래도 부에서 은퇴한 뒤 한가해진 3학년의 끝무렵에는 눈치 챈 것도 같다.
수많은 기억들은 항상 너를 중심으로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내 기억 속의 너는 항상 예쁘게 웃고 있었고, 그것은 눈 앞에 있는 너도 똑같았다. 네가 웃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매 번 새로이 너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아마 죽을 때까지 똑같을 것이다.
“… 이와쨩?”
이와이즈미의 긴 고백을 오이카와는 내내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시합 중에도 잘 보이지 않던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이와이즈미를 경멸하고 있을까. 아니면 순수하게 놀랐을까. 분명한 것은 이와이즈미는 내내 고민하고 억누르던 감정을 졸업식날에 와서 터뜨린 것이다. 이와이즈미가 다시 입을 떼었다.
“난 널 좋아해.”
“……”
“언제부턴진 몰라.”
얼굴은 애처로울 만큼 처절했지만 이와이즈미의 고백은 그 진중한 성격을 닮아 내내 담담했다. 다만 오이카와는 오랫동안 함께 해 온 만큼 이와이즈미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의 이와이즈미는 조금만 잘못 건드렸다간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다시 입을 떼었다.
“네가 좋아. 아니, 널 사랑해.”
“……”
“너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나였으면 좋겠어.”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고백은 딱 그 시간만큼 무거웠다. 오이카와는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입을 떼지 못하는 오이카와를 보던 이와이즈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답, 안 해도 돼.”
“이와쨩…”
“다시 안 볼 지도 모른다는 각오하고 얘기한 거야. … 갈게.”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입을 떼지도 않았고,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다. 교실을, 학교를 벗어나며 이와이즈미는 계속 울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코치가 가볍게 웃어넘기며 한 말의 무게를 이와이즈미는 지금 느끼고 있었다. 가슴 속이 아프다 못해 저려 올 정도였다.
교문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 이와이즈미의 교복 자락을 잡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무릎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인 오이카와가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얼마나 뛴 건지 헛구역질을 하며 기침을 하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쫓아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이와이즈미가 쩔쩔맸다. 갈 곳을 잃은 두 손이 허공 위에서 왔다 갔다 했다. 겨우 숨을 고른 오이카와가 고개를 확 쳐들며 말문을 열었다.
“좀 기다려주면 어디가 덧나? 이와쨩은 사람이 왜 그렇게 급해요? 대답 듣고 가면 뭐, 다시는 배구를 못 하기라도 해? 이와쨩이 나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어. 그게 뭐 어때서? 나라고 고백 할 생각 안 했는 줄 알아?”
“오이카와?”
“나도 이와쨩 좋아한단 말이야!”
이와이즈미는 하마터면 오이카와에게 같잖은 동정심에, 친구를 잃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하는 이야기라면 집어 치우라고 할 뻔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오이카와가 벅찬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이와이즈미는 잠시 오이카와를 보며 방금 들었던 말을 머리 속에서 다시 맞췄다. 오이카와는 방금 전에 이와이즈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 그를 깨닫고 나니 멍하게 오이카와를 볼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다시 입을 떼었다.
“좋아해. 이와쨩이 좋아. 언제부터 좋아했는진 아마 평생 모를 거야. 근데 좋아하는 마음은 이와쨩한텐 지지 않을 거야.”
“넌 이런 것까지 이겨 먹으려고 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고백하고 싶었는데 못 했었단 말이야.”
오이카와의 고백은 이와이즈미와는 반대로 감정적인 제 성격만큼이나 격정적이었다. 아까의 이와이즈미와 마찬가지로 오이카와도 눈물을 줄줄 흘려댔다. 고개를 숙인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텅 빈 교정을 계속해서 울렸다.
“좋아해, 좋아해 이와쨩, 좋아해, 좋아해, 좋,”
마지막 말은 오이카와의 어깨를 당겨 안은 이와이즈미에 의해 막혔다. 이와이즈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오이카와는 소리 내 울었다. 이와이즈미도 오이카와를 안은 채 울었다. 낭만적이어야 할 고백은 눈물 냄새만 났다. 어찌 되든 상관 없었다. 지금은 눈 앞의 사랑스러움만이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