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건 늦었지만 생일 기념으로 드리는 거구... 하나 더 드릴 거. 그건 글 봐주신 감사 선물.
그나저나 엠프렉 하면 이런 비슷한 소재만 떠올려서 클났음...
축하합니다. 임신이네요.
한 생명을 품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사의 목소리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건조했다. 오이카와는 의사의 말을,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오이카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젊은 의사가 차트를 넘겨 보며 다시 입을 떼었다.
“오이카와 씨, 지금 임신 6주 차예요.”
병원을 나와 집에 도착한 오이카와는 거실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에 저도 모르게 흠칫한 오이카와는 엉덩이를 살짝 떼어 자세를 고치곤 조심스럽게 앉았다. 몇 분 앉아 있던 오이카와는 재킷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검사 뒤에 받은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었다. 사진 속 조그맣고 동그란 하얀 것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눈물이 나서 오이카와는 사진에 얼굴을 묻곤 엉엉 울어버렸다.
오이카와는 최근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가벼워 보이는 것과 다르게 제 몸이 소중한 줄은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관계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갖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작년 겨울에 1년을 사귄 연인과 이별했고, 그 뒤로 쭉 솔로로 지내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애는 누구 애인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코즈메 켄마.
코즈메는 직장 동료인 쿠로오의 오랜 친구였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처럼 거의 태어난 직후부터 함께 했다고 들었다. 쿠로오의 소개로 알게 된 코즈메와는 금방 친해져서 쿠로오 없이도 만나 종종 식사를 같이 하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는 사이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지만, 오이카와는 자주 코즈메를 앓았다.
쿠로오가 코즈메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저도 모르게 귀를 세웠고, 밥 먹자는 별 거 아닌 연락도 수 십 번을 고민한 뒤에 겨우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었고, 자꾸 SNS에 들어갔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몇 주 전에 오이카와는 코즈메와 섹스를 했다. 술김에 오이카와는 코즈메에게 좋아한다고 툭 던지듯 고백했고, 코즈메는 답이 없었다. 다만 장소는 금방 술집에서 근처의 호텔로 바뀌었고, 그 날의 새벽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길었다. 오이카와는 그 새벽동안 많이 울었고, 코즈메는 그런 오이카와의 눈가에 계속 입을 맞췄다.
그 날의 일을 떠올리니 오이카와는 다시 눈가가 달아오르는 듯 했다. 좋았지, 그 때. 하지만 그 날 이후 코즈메의 연락은 뚝 끊겨버렸다. 쿠로오에게 듣기로는 외주 일이 서너개 연달아 들어와서 바쁘다는 것 같았지만 잠깐 연락할 시간도 없나 싶다. 제가 먼저 연락을 해 볼까 망설이던 오이카와는 결국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오이카와는 이제 임신 7주 째였다. 그 동안 코즈메에게선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 동안 오이카와는 쿠로오가 코즈메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어색하게 화제를 돌려야 했다. 전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거북했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오이카와는 코즈메가 궁금했고, 그를 알고 싶었다. 다만, 조금 많이 혼란스러웠다.
집에 도착한 오이카와는 대충 가방만 내려놓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한참 누워 천장을 보던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통화 목록에 들어갔다. 익숙한 이름을 눌러 전화를 걸고, 신호음이 가다 보면 금방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온다.
-네가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하냐.
“이와쨩...”
평소와 같은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온다. 오이카와가 우는 소리에 핸드폰 너머로 이와이즈미가 당황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핸드폰을 놓지 못한 채 허둥대는 모습이 눈 앞에 선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참동안 울다 웃다 했다.
-이제 다 울었냐.
“으응.”
-그럼 왜 울었는지 말 해봐.
...이렇게 할 얘긴 아니고, 만나서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럼 술 사. 아, 나 술은 안 될 것 같아. 그럼 밥 먹으면서 해. 우리 회사 앞에 고깃집으로 와. 응. 이따 봐. 꽤 많이 울어 댄 것 치고 이와이즈미와의 통화는 담백하게 끝났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내려다보며 쓰다듬었다.
“... 이상해.”
어머니가 자신을 가졌을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오이카와는 자신의 배 안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 힘들었다. 겉보기엔 전이랑 다를 게 없는데. 앉은 곳에서 바로 보이는 거울을 보며 오이카와는 자꾸 배를 쓰다듬었다.
“......”
“이와쨩 더럽잖아! 얼른 닦아!”
마시던 물을 주륵 흘리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오이카와가 기겁했다. 이와이즈미는 혼란스러웠다. 얼마나 혼란스러웠냐면, 오이카와가 건네는 휴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할 정도로. 이와이즈미가 휴지를 받아 들 정신이 아닌 것을 알아챈 오이카와는 테이블에 흘린 물을 대신 닦았다. 오이카와가 대충 휴지를 뭉쳐 제 옆에 둔 뒤에야 이와이즈미가 말을 더듬거리며 입을 떼었다.
“그, 그, 그, 그럼 ㄴ, 너 배에...”
“응.”
아기가, 있어. 오이카와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이와이즈미는 미칠 것 같은 노릇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이젠 남자도 임신을 할 수 있다지만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제 소꿉친구가 그 이야기의 당사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 그 녀석은 알아?”
“아니...”
많이 바쁜가 봐. 여기까지만 말하고 오이카와는 제 옆에 있던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쓸쓸한 얼굴의 소꿉친구를 보며 이와이즈미는 더 입을 떼지 못했다. 이와이즈미를 본 오이카와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와쨩, 어디 가서 그런 얼굴 하지 마.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기 싫으면.”
“... 내가 너 임신했으니까 참는다.”
평소라면 손이 먼저 나가 오이카와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 쳤겠지만 일단은 애를 가졌으니 이 쪽이 참는 수밖에.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쓴 채 냉수를 들이켰다.
오이카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본 이와이즈미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졌다. 쿠로오가 오이카와에게 코즈메를 소개해 준 것처럼 오이카와도 쿠로오에게 이와이즈미를 소개해 주었고, 코즈메와 오이카와처럼 이와이즈미와 쿠로오도 금방 친해져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을 정도였다. 연락처에서 쿠로오의 이름을 찾은 이와이즈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어쩐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지금 어디냐? 만날 수 있어?”
-지금... 집에 가는 중. 무슨 일인데?
만나서 얘기한다. 근처 아무데나 들어가 있어. 위치 찍어서 보내고. 전화를 끊은 뒤 쿠로오는 순순히 자신의 위치를 보냈고, 이와이즈미는 뛰기 시작했다. 핸드폰 너머에서 울다 웃다 하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쿠로오가 있는 곳은 회사 근처의 카페였다.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작고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이었다. 쿠로오는 아메리카노 하나를 마시며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맞은 편에 앉자 쿠로오는 핸드폰 액정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곧 다가온 직원에 이와이즈미는 카페라떼를 시켰다. 이와이즈미가 시킨 라떼가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직원이 라떼를 가져다 주자, 쿠로오는 그제서야 입을 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 코즈메가 오이카와 얘기 안 해?”
이와이즈미의 입에서 나온 코즈메의 성에 쿠로오가 조금 움찔했다. 한 달 조금 더 전에, 코즈메는 쿠로오에게 오이카와와 섹스를 했다고 했다. 코즈메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코즈메가 오이카와에게 관심을 보이던 것을 알았던 쿠로오는 내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코즈메는 일절 오이카와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다. 이와이즈미가 잘 알지도 못하는 코즈메의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오이카와 쪽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라떼를 조금 마신 이와이즈미가 입을 떼었다.
“웬만하면 본인이 직접 얘기하라고 하고 싶은데, 아까 그 녀석 우는 거 보니까 고생 많이 했겠구나 싶더라.”
“그게 무슨...”
“됐어. 너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야.”
이와이즈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쿠로오는 그제서야 최근 일주일 동안, 코즈메 이야기만 나오면 어색하게 얼굴이 굳던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 있는 것이 틀림 없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이와이즈미가 입을 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말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
“그 새끼, 지금 당장 내 앞에 데려와. 아니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쿠로? 여기까지 웬 ㅇ...”
코즈메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와이즈미가 코즈메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선 얼굴에 주먹을 꽂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몇 주 동안 일이 바빠 밤샘이 잦았던 코즈메는 그 주먹 한 방에 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놀란 얼굴로 이와이즈미를 올려다 보자 화를 꾹 눌러 참는 얼굴로 입을 떼었다.
“나는 이와이즈미고, 어릴 적부터 오이카와의 친구다.”
“......”
“마음 같아선 네놈을 몇 대 더 때려야 속이 풀릴 것 같은데 그건 안 될 것 같네.”
얼떨떨한 얼굴로 이와이즈미를 보던 코즈메는 쿠로오가 일으켜 준 뒤에야 어정쩡하게 설 수 있었다. 한참을 코즈메를 노려보던 이와이즈미가 한숨을 쉬곤 입을 떼었다.
“너, 오이카와랑 섹스했지?”
이와이즈미의 말에 코즈메가 조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이즈미는 추궁하듯 이어 물었다. 왜 오이카와한테 연락 안 했는데? 그 녀석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코즈메는 계속 이와이즈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떼었다.
“바빠서... 요. 오이카와도 혼란스러웠을 거고... 생각을 다 정리하면 먼저 연락할 거라고 생각해서...”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코즈메의 말이 변명인 것 같지는 않았다. 마른 세수를 한 이와이즈미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입을 떼었다.
“그 녀석은 말야, 시합을 할 때면 몰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먼저 연락할 정도로 담이 세지 못해.”
“......”
“그러니까 자기가 임신한 것도 얘기 못 하고 끙끙대지.”
이와이즈미의 말에 코즈메는 무언가로 뒷통수를 세게 맞은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얼얼하게 남아있던 왼 쪽 뺨의 통증이 어디론가 흩어져 사라진 것만 같았다. 어느새 코즈메는 자신도 모르게 이와이즈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오이카와, 지금 어디 있어요?”
무료하게 소파에 누워 시간을 때우던 오이카와는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놀라 일어났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나 싶더니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에는 초조한 얼굴의 코즈메가 있었다. 아까보다 더 놀란 오이카와는 서둘러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정리했다. 대충 옷 매무새도 정리한 오이카와는 조금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오이카와.”
“... 들어와.”
원래 다른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쪽은 코즈메였다. 오이카와가 아무리 얼굴을 마주 보려 애써도 코즈메는 항상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완전히 뒤집혀서 코즈메가 오이카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오이카와가 코즈메의 시선을 피했다. 오이카와는 코즈메에게 앉으라고 했고, 코즈메는 오이카와의 옆에 앉았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돌렸다. 코즈메가 입을 떼었다.
“오이카와.”
“......”
“토오루, 나 봐봐.”
코즈메가 이름을 부르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코즈메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니 오이카와는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리깔며 한숨을 쉰 코즈메가 오이카와를 안았다.
“... 왜 말을 안 했어.”
“다 알고 온 거야?”
“응.”
친구, 이와이즈미 씨한테. 이와쨩 만났어? 응. 쿠로랑. 어떻게? 우리 집에 왔었어. 오이카와는 그제서야 코즈메의 옷이 목 늘어난 티셔츠에 후줄근한 트레이닝 바지인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신발도 슬리퍼였던 것 같다. 이와이즈미에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 것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코즈메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얼마나 된 거야?”
“7주.”
“배는 하나도 안 나왔네.”
“원래 초산은 5개월까진 티가 안 난대. 남자들은 6개월까지도 그런다던걸.”
그렇구나. 대화는 그 쯤에서 끊어졌다. 코즈메도, 오이카와도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 지 고민했다. 잠깐의 침묵 끝은 먼저 입을 뗀 오이카와의 목소리였다.
“... 무서웠어.”
“......”
“내가 이 얘기를 했을 때, 켄쨩이 어떤 표정을 지을 지 몰라서, 그게 무서웠어.”
오이카와의 말에 코즈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토록 못미더운 사람이었나. 코즈메는 오이카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입을 떼었다.
“토오루, 나는 말야.”
“......”
“좋아하는 사람이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얘길 들으면 당연히 기뻐해.”
코즈메의 목소리에 오이카와가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놀라움을 가득 안고 있었다. 코즈메가 그런 오이카와를 보며 입가에 살짝 웃음을 걸었다.
“좋아해, 토오루.”
“......”
“늦게 말해서 미안해.”
일단 혼인신고부터 할까. 그래. 집은 어디가 좋아? 우리 집이 좀 더 넓으니까 켄쨩이 들어와. 아니, 내년이면 애기 태어날 텐데 그냥 새 집을 구하자. 그러는 게 좋겠다. 식은 언제 올릴래? 나는 배 나오기 전에 부랴부랴 하는 거 싫어. 애 낳고 관리한 다음에 천천히 할 거야. 토오루가 그렇게 하겠다면 나도 찬성이야.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다 서로에게 기대 잠들었다. 그 와중에도 손은 꽉 잡은 채였다. 1년 뒤 태어난, 오이카와를 똑 닮은 딸에 코즈메는 물론이고 쿠로오와 이와이즈미까지 흐물흐물 녹아버린 건 더 나중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