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카와
잇세이는 침묵한다. 마주 앉은 연인은 그에게 시선 한 줌도 주지 않은 채 묻고 있었다. 대답 없이 빨대로 잔 속을 몇 번 저은 마츠카와 잇세이는 9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연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그 만큼이나 됐구나. 빨대를 내려놓은 마츠카와 잇세이는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사귀었으니까.”
“시간
엄청 빠르네.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대화는
끊겼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연인은
창 밖만을 보고 있었다. 말없이 커피만 마시던 연인이 입을 떼었다.
“그만
할까.”
마츠카와
잇세이는 고개를 들어 연인을 마주 봤다. 그는 여느 때처럼 여유 가득한 웃음을 만면에 띄우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스튜를 해 먹겠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듯, 그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반문하지 않고
그래, 했다.
“잘
지내.”
“너도.”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벗어났고,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길로 전화번호를 바꿨고, 상대방을 차단했다. 천 장에 가까웠던 사진첩은 통째로 지워 버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 뜨겁고 찬란했던 9년 연애의 종국은 이토록 차갑고 허무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미련을 갖지 않았다.
“잇세이, 저것 좀 봐.”
누나가
가리키는 것은 TV의 뉴스 화면이었다. 아나운서는 감정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캘리포니아에서 일본인 유학생 남성이 묻지마 살인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흥미 없는 눈으로 뉴스를 보며 소매의 단추를 잠궜고, 누나는 호들갑을 떨며 제 동생을 돌아
보았다.
“너도
조심해. 사람 죽는 거 한 순간이더라.”
“저긴
미국이잖아.”
“사람
죽는데 미국이고 일본이고 다르니? 다 똑같아.”
마츠카와
잇세이는 누나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마이를 챙겨 입곤 거울 앞에 섰다. 학생 시절에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외모가 못내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20대 후반이 되니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다시 한 번 매무새를 살핀 마츠카와 잇세이는 다녀 온다는 인사를 하며 문을 나섰다.
동창회
장소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본가가 시내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이럴 때 편리하다고, 마츠카와 잇세이는 생각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한
마츠카와 잇세이는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 마츠카와!”
제일
먼저 반겨 준 이는 간간히 연락을 이어가던 동창이었다. 누구와도 쉽게 섞이는 그는 그 성격답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그의 인사를 받아 주며 맞은 편에 앉았다.
“이야, 10년 전엔 노안이었는데 이젠 동안이네!”
“싸우자는
거냐?”
“칭찬이야, 칭찬! 이와이즈미는 왜 이렇게 안 오냐?”
동창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연인의 오랜 소꿉친구였다. 마츠카와 잇세이의 연인은 뒷손이 야무지지 못했기에, 늘 소꿉친구가 잔소리를 하며 그를 챙기곤 했다. 그 때문에 마츠카와
잇세이는 그를 많이도 질투했었다. 그 이름을 들으니 연애 초기 시절이 떠올라 마츠카와 잇세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지었다.
“양반은
못 되네. 야, 이와이즈미!”
마츠카와
잇세이가 뒤돌아 본 곳에는 연인의 소꿉친구가 걸어오고 있었다. 동창의 부름에 손을 흔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츠카와 잇세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그와 형식적인 인사만을 나누고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오니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까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어스름한 정도였는데, 이젠 완전히 해가 져 있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탁한 연기가
머리 위로 흐르다 공기 속에 섞여 사라졌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데 옆에 다가온 이는 연인의 소꿉친구였다. 마츠카와 잇세이의 옆으로 다가온 그는, 말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마츠카와 잇세이가 아는 그는 담배를 지독하게도 증오하는 부류 중 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연인은 몇 번 담배를 피우다 소꿉친구에게 얻어 맞곤 했다. 담배
하나가 완전히 타 들어간 뒤에야 마츠카와 잇세이에게 물었다.
“헤어졌지?”
“응.”
“그럴
것 같더라.”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연인의 소식을 물을까 고민했다. 헤어진
지 갓 한 달을 넘겼는데 물어도 되나 싶은 생각과 동시에 어차피 친한 친구였는데 상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괴롭혔다. 잠시 고민한 끝에 마츠카와 잇세이는 소꿉친구에게 연인의 안부를 물었다.
“오이카와는
어떻게 지내?”
그는
불을 피우던 손을 멈췄다. 곧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유학
갔어.”
그의
대답에 마츠카와 잇세이는 자신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었다. 유학 때문에 헤어지자고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어차피
끝이 보이던 관계였다. 그의 유학이 아니더라도 종잇장 같은 관계는 금방 찢어질 것이었다. 질질 늘어질 바엔 차라리 깔끔하게 끝을 내는 것이 참 그의 성격답다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이야기에,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근데
죽었어. 여기 시간으로 오늘 아침에.”
마츠카와
잇세이는 연인의 소꿉친구를 돌아 보았다. 그제서야 아주 조금, 빨갛게
부어 오른 눈가가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피우지 못한 채 타 버린 담배를 비벼 끈 그는 마츠카와 잇세이를
똑바로 보며 다시 입을 떼었다.
“그
녀석, 계속 널 좋아했어.”
“……”
“마음
같아선 계속 너랑 사귀고 싶었대.”
근데
유학 때문에 헤어지자고 한 거야. 헤어지고 오는 길에 많이 울었어.
그의
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뜨겁게도 사랑했던, 이젠 그저
잘 살기만을 바랐던 전 연인의 죽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렸다. 어떻게 해야할까. 마츠카와 잇세이는.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