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답에 쇼스케 녀석은 에, 하고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소꿉친구인 녀석은 초등학생 때부터 농구를 했는데, 운동에는 별 재능도, 흥미도 없던 내가 하는 일의 전부는 쇼스케가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에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농구엔 나름대로 열정을 갖고 있는 만큼, 한 번 시작하면 제 때에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드물었으니까. 녀석의 어머니가 간곡히 부탁한 만큼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그 일을 나름대로 충실히 지켰다.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니 이젠 동아리의 선배들에게 그 일을 넘기고 싶다는 게 내 속내였다. 쇼스케는 몇 번이고 진짜 안 들 거냐며 물었고, 나는 그 때마다 친절하게도 안 들 것이라 답해주었다. 결국 단단히 삐진 쇼스케는 자기에게 부 내에서 잘 맞는 파트너가 생겨도 질투하지 말라며 툴툴거리곤 제 반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모습을 보다가 기지개를 쭉 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혼자였다. 오늘은 쇼스케가 들어간 농구부의 임시 부원들을 대상으로 한 오리엔테이션 날이라고 했다. 언제 삐졌냐는 듯 두 손을 싹싹 비벼대며 나중에 소금 캐러멜 두 봉지를 바치겠다는 쇼스케에게 딱밤을 때리며 얼른 부활동에나 가라고 하니 다시 한번 더 사과를 하곤 사라지는 것이다. 그 뒷모습을 보며 두어 번 손을 흔들고 난 뒤에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해가 밝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랜만이다. 키타가와 제 일 중학교의 통학로에는 벚꽃이 굉장히 많이 피어있어서 혼자 가는 길도 그런대로 심심하진 않았다. 바람에 실려오는 꽃냄새에 코가 근질거려 재채기를 한 번 하고 나니, 조금 앞에 선 남자 두 명이 보였다. 옷은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고… 두 명 다 키가 크다. 처음에는 농구부인가 했는데, 오늘 농구부는 임시 부원 오리엔테이션이 있다는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다. 그렇다면… 배구부인가. 어떻든 나랑은 상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고 했다.
“저기, 잠깐만!”
누군가의 목소리에 팔이 붙잡히며 몸이 돌아갔다. 두 명의 남자, 선배라고 해야겠지. 둘 중 키가 조금 더 큰 쪽의 선배가 나를 붙잡았다. 아까는 지나치듯이 봐서 몰랐는데,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다. 뭐라고 해야할까, 음, 그래. 마치 여름이 잘 어울릴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같은 남자라는 사실도 잊고 잠시 넋을 놓던 순간, 별안간 그가 잘생긴 얼굴 한가득 웃음을 피우며 입을 떼었다.
“너, 신입생?”
“… 네.”
“배구부 안 들어올래?”
갑작스러운 입부 권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 쇼스케 녀석을 피했더니 이번엔 모르는 선배인가. 운동신경은 나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뛰어나게 좋은 편도 아니다. 권유에 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최대한 예의를 차려 거절했다.
“생각 없는데요.”
이크. 생각보다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에 조금 신경을 쓸 때, 앞의 선배가 우는 소리를 냈다.
“들어와줘! 우리 이번에 신입 부원이 너무 적어서 고민이야!”
“그 쯤 해 두지?”
조금 곤란해지려던 때에 그를 저지해 준 것은 옆에 있던 다른 선배였다. 가쿠란의 뒷목을 홱 잡아챈 그는 짧게 미안하다, 한 마디 하곤 내가 오던 방향으로 그 선배를 끌고 갔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선배는 손을 흔들어대며 무어라 외쳐댔다.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야! 배구부 주장이고! 다음에 또 보자!”
그 사람, 오이카와 선배와는 정말 끈질기게도 마주쳤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자주 마주치니 그런 생각마저도 금방 사라질 수밖에-.
“안녕, 쿠니미쨩! 배구부 안 들어올래?”
“안 들어가요.”
내 이름은 쇼스케 녀석이 가르쳐 준 것이다. 그 날 이후 처음 마주쳤을 때 재수없게도 옆에는 료스케가 있었고, 내 이름을 듣지 못했다며 물어보려는 오이카와 선배를 나는 적당히 무시하려 했는데 이 쇼스케 자식이 이 녀석 이름은 쿠니미 아키라예요, 한 것이다. 참고로 오이카와 선배는 쇼스케에게도 배구부 가입을 권유했다. 시원스럽게 까였지만.
“진짜 안 들어갈거야?”
“뭘?”
“배구부.”
그리고 쇼스케가 턱짓을 했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우리 반을 포함한 1학년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오이카와 선배가 웃고 있었다. 쇼스케는 우유를 한모금 쭉 빨며 다시 입을 떼었다.
“웬만하면 들어가지? 아깝잖아. 인생에 한번뿐인 중학 생활인데.”
“내 이상적인 중학 생활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와 집에 할애하는 거야.”
“이 게으름꾼아.”
보다 못한 건지 쇼스케는 살짝 인상을 쓰며 우유 팩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 친구의 은애에 나는 친히 감사하며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때려주곤 방향을 틀었다. 쇼스케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디가?”
“매점. 도시락 잊었어.”
“알았어. 운동장 벤치에 있는다.”
“그래.”
운 좋게 하나 남은 야끼소바 빵을 사고 나니, 수중에 남은 것은 10엔이 고작이었다. 마실만한 음료수를 사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도시락과 함께 지갑을 잊은 내 죄라고 생각하니 너그러워져 다시 발을 뗄 수 있었다. 그리고 매점을 나서려다 마주친 것은 오이카와 선배였다.
“쿠니미쨩?”
“… 안녕하세요.”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줄래? 오이카와 씨는 점심시간까지 가입 권유를 하진 않는답니다-.”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린 오이카와 선배는 문득 내 손에 들린 야끼소바 빵을 내려다 봤다. 웬 거냐고 묻자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도시락을 잊었다고 순순히 이야기했다.
“아아, 그래서 들고 있었구나. 마실 건?”
“지갑도 잊어서요. 쇼스케 걸 뺏어 마시면 돼요.”
“안되지. 성장기 남중생에겐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마실 것도 중요하다구.”
그렇게 말한 선배는 잠시 기다리라며 매점 안쪽으로 들어가선 우유빵과 함께 커피우유를 하나 사들고 나왔다.
“받아.”
“…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피식 웃은 선배는 그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우유빵을 뜯으며 매점을 나섰다. 선배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팩 속에 든 커피우유의 냉기가 손까지 전해져왔다. 선배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해? 빨리 나와. 친구한테 데려다줄게.”
짧게 대답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선배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살짝 눈을 찌푸렸다가 눈을 비비며 매점을 빠져나왔다. 그저 벚꽃에 햇빛이 반사되었을 뿐이다, 생각하며 발을 떼었다.
어제 해가 쨍쨍한 것은 꿈이었던 게 틀림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가 이렇게 쏟아질까. 아니, 사실은 비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아침부터 온 하늘에 먹구름이 깔려있었으니. 그래도 어제 날씨가 좋았던 만큼 비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 결과에 의해 나는 지금 우산도 없이 학교에 방치되어 있다. 쇼스케는 농구부 활동을 갔고, 녀석도 우산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매점에 있던 비닐 우산은 매진된 지 오래였다.
잠시 고민을 하다 학교 근처의 편의점으로 뛰어가기로 했다. 그 곳에는 우산을 팔고 있을 테니까. 가방을 머리에 지고는 심호흡을 한 뒤 빗속으로 뛰어들려는데, 누군가 교복 겉옷을 붙잡아서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오이카와 선배가 내 옷을 잡고 있었다.
“안 돼, 쿠니미쨩. 이거 맞고 갔다간 감기 걸릴거라구.”
“편의점에서 우산 사려고 했고, 집에 가자마자 목욕할테니 괜찮아요.”
“그래도 안 돼. 가는 곳까지 같이 가자.”
선배의 손에는 검은색 접이식 우산이 들려있었다. 그 친구인 선배는 어딜 간 거지. 고개를 갸웃하니 낮게 웃음을 터뜨린 오이카와 선배가 다시 입을 떼었다.
“이와쨩은 조퇴했어. 집안 일 때문에.”
“그런가요.”
내가 대답하는 사이 선배는 우산을 펼치고 있었다. 펼쳐진 우산 안쪽에는 파란 하늘에 구름이 뜬 이미지가 프린트되어있었다. 선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무심결에 했다. 내가 멍하니 서있자 선배가 다시 나를 불렀다.
“들어와. 어디 살아?”
“역 근처요. 공원 근처의.”
“헤에, 그렇구나. 데려다주고 바로 역으로 가면 되겠네.”
“선배는 멀리 사세요?”
“조금? 지하철로 두 정거장.”
선배는 나를 재촉하듯 한 번 더 손짓했고, 나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우산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나와 선배의 체격 차가 많이 크다지만, 결국 두 사람이 쓰기엔 좁을 수밖에 없다. 너무 붙으면 불편할 것 같아 거리를 두려는데 불쑥 다가온 선배의 손이 내 어깨를 그러안았다.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선배가 답지 않게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돼. 다 젖어.”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더 붙어.”
“…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곤 선배에게 더 붙어 팔을 살짝 잡았다. 이후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말 수가 적은 편이었고, 선배도 오늘따라 침묵을 지켰다. 역이 가까워 질 즈음, 나는 선배에게 물었다.
“오늘은 안 하세요?”
“뭘?”
“가입 권유요.”
“아아, 그거… 그만뒀어.”
내일이면 임시 입부 마지막날이고, 쿠니미쨩은 내가 아무리 잡고 흔들어도 배구부는 안 들어올 거잖아? 선배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역 앞에 도착하자 선배는 내 손에 우산 손잡이를 쥐어 주었다.
“뭐, 이제 신입 부원들도 많이 들어왔고. 입부 안 해도 쿠니미쨩, 나랑 제법 친하지 않아?”
“……”
“그렇다고 해줄래? 민망하니까.”
“뭐, 친하다면 친하겠네요.”
“그래. 그러니까 같은 부원이 아니더라도 종종 얼굴 보면 돼.”
그리고 선배는 가방을 머리에 쓰곤 역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 손을 내려다봤다. 플라스틱으로 된 우산 손잡이에는 선배의 손이 품고있었을 온기가 남아있었다.
선배가 알려준 교실로 갔을 때, 선배는 없었다. 대신 항상 함께 다니던 친구가 다른 선배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를 쳐다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친구들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너 오이카와가 쫓아다니던 1학년이지? 이름이…”
“쿠니미 아키라예요. 저… 이와쨩… 선배?”
“이와이즈미다. 무슨 일인데?”
“오이카와 선배는…”
“아, 결석했어. 감기로.”
나한테는 그렇게 감기 걸린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결국 감기에 걸린 것은 선배였다. 우산을 든 손이 민망해지려는데 이와이즈미 선배가 손을 내밀었다. 선배를 올려다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거 오이카와 우산이지? 내가 전해줄게. 바로 옆집이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이와이즈미 선배에게 내민 것은 입부 신청서였다. 서툴게 적은 한자 이름이 이제 와서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조금 놀란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 본 이와이즈미 선배는 곧 피식 웃으며 입부 신청서를 받아들곤 내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으니 꼭 나오라는 말을 하며 교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배구부에 들어온 뒤 가장 의외였던 것은 오이카와 선배가 상당히 열정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장이 된 건가. 엉뚱한 생각을 하며 공을 주워 정리했다. 뒤쪽에서 선배는 여전히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흘긋 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문외한 수준이었지만 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굳이 다른 팀의 경기를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처음 마주쳤을 때의 선배와 요즘의 선배는 다르다. 다르다고는 해도 아주 작은 의심에 불과했다. 조금 덜 웃고, 조금 더 연습을 한 것 뿐이니까. 괜찮냐는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내 착각일수도 있었기에, 나는 선배를 향한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의심이 확신이 된 것은 연습경기 날이었다. 선배는 처음으로 많은 미스를 냈고, 그만큼 실점도 많아 마지막 세트는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다. 점수판을 넘기며 조금 초조해진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보는데 감독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 네가 들어가라.”
카게야마는 나와 함께 배구부에 들어온 신입 부원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배구를 시작한… 소위 말하는 천재. 선배는 비척거리며 카게야마와 교체하고 벤치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그는 주먹을 꾹 쥐었다. 점수판이 넘어갔다. 카게야마는 들어가자마자 팀의 점수를 따냈다.
그 날은 쇼스케와 함께 돌아갔다. 카게야마는 자율 연습을 한다고 했고, 킨다이치는 부모님의 심부름을 갔기 때문이었다. 나름 소꿉친구인데 마지막으로 함께 돌아갔던 기억이 아득해 스스로도 꽤나 놀랐다. 둘 다 부활동에 나름 열심이기 때문이겠지.
교문을 향해 가며 체육관 쪽을 돌아보았다. 바닥에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음을 떼었다. 순간, 걸음을 멈췄다.
나는 선배를 걱정하는 건가?
내가 멈춰 선 줄도 모르고 앞서 걷던 쇼스케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내 쪽으로 올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다 고개를 젓고는 다시 발을 떼었다. 부활동 선후배라면 걱정 정도는 할 수 있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쇼스케에게 농담을 건넸다.
전날의 걱정이 허무할 정도로 선배는 금방 되돌아왔다. 다만… 플레이 스타일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것이냐 물어보려다 관뒀다. 이와이즈미 선배의 이마에 붙은 반창고를 보면 절대 짧게 끝날 듯한 이야기가 아니므로.
삼학년들의 마지막 시합은 금방 다가왔다. 선배들은 전일본 중학교 배구 선수권대회 이후 전국 도도부현 대항 중학 배구대회까지도 은퇴하지 않았다. 그 현 내 예선 경기에서 키타가와 제 일 중학교는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벤치에도 들지 못한 나는 응원 도구를 들고 객석에서 팀의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구호를 외친 선배들은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로 경기를 시작했다.
… 그리고 나는 시합 내내 선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선배가 경기를 하는 모습은 이 일 년동안 수도 없이 봤다. 비공식적인 연습경기든, 공식 경기든. 그가 서브를 넣는 것도, 토스를 올리는 것도, 리시브를 하는 것도 아주 많이 봐서 눈을 감고도 잘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오이카와 선배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이 순간, 가장 뜨거울 코트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그에게서 나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가 토스를 올렸다.
아름답다.
순간, 모든 언어는 잊어버리고 그 한마디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정말 냉정히 이야기하자면 토스를 올리는 것은 일 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이다. 허나 그 짧은 순간은 영원처럼 내 머릿속에 박혀버렸다. 양 옆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부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휘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획득 세트 수는 한 개. 삼학년이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시라토리자와 중등부에게 한 세트를 따냈다.
이후로는 정말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삼학년들은 은퇴했고, 이학년 중에서 새로운 주장과 부주장이 나왔다. 삼학년들은 시합때문에 뒤쳐진 공부를 하며 고등학교의 수험 준비를 했고, 우리는 조금 여유 있게 부활동을 했다. 제대로 된 연습은 신입생들이 들어온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는 새로운 주장의 의견 때문이었다. 내 입장에선 두 팔 벌려 만세를 외칠만한 소식이었다.
그리고 졸업식은 금방 다가왔다.
이와이즈미 선배의 옷자락을 붙잡은 킨다이치는 학교가 떠나가라 엉엉 울었고, 카게야마는 그 뒤에서 우물쭈물하며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우리 중에서 키도 제일 작은데 안고있는 꽃다발은 가장 많은 걸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다들 단추를 받으러 왔을 테다. 오이카와 선배 몫의 꽃다발은 내가 들고 있었지만 귀찮은 일에 엮이긴 싫은 마음에 몇 발치 떨어져서 그를 보고 있었다.
교복의 단추가 전부 떨어진 뒤에야 여학생들은 선배에게서 떠나갔다. 앞섬도, 소매도 너덜너덜해진 모습을 보니 저 교복은 어디에 팔지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선배는 나를 돌아보며 기다리게 했다며 사과를 했다.
“안 추워요?”
“괜찮아. 3월이고.”
“내일부터 다시 추워진다는데.”
“오코타에서 안 나오면 돼.”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오코타는 세 살 위의 누나가 초등학생 때나 쓰던 말이었다. 선배는 아직 저 말을 쓰는구나. 웃음을 꾹 참고는 선배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선배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가쿠란 안쪽을 뒤적거리곤 내게 손을 내밀어보라 했다. 살짝 의문을 가진 채 손을 내미니 작고 동그란 것이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교복 안쪽에 달려 있던 예비용 단추였다.
“답례야. 그렇게 안 들어온다고 했는데 결국 배구부에 입부해줬으니까.”
“필요 없는데요. 단추라면 저도 많고… 선배의 단추라면 원하는 사람들이 많을걸요.”
“아니, 이건 쿠니미쨩만을 위한 단추야. 절대 아무한테도 주면 안 돼.”
그리고 선배는 내 손을 오므렸다.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은 선배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나보다 훨씬 큰 뒷모습이 서서히 작아졌다. 그제서야 나는 어떤 감정 하나에 확신을 품었다.
아아,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도시락을 잊었던 날의 점심시간일수도 있고, 한 우산을 쓰고 걷던 날일 수도 있다. 어쩌면 처음 만난 날부터일지도 모르겠다. 선배는 뛰어간 곳에 있던 누군가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고,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농구부 선배들과 인사를 한 쇼스케가 다가왔다. 쇼스케는 내가 오늘따라 멍하다며 걱정했고, 나는 괜찮다며 열을 재려는 손을 밀어냈다.
“쇼스케.”
“응?”
“나 배구 열심히 할거야.”
선배는 배구 강호인 아오바죠사이 고등학교로 갔다. 그 곳에 가려면 일단 나 자신의 실력부터 쌓아야 했다. 또, 그가 소중히 여기던 배구를 나도 좋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를 다시 만나려면 2년이 더 필요했고, 나는 그동안 그가 걸었을 배구의 길을 천천히 따라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