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살면서 가장 지옥 같았던 날을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어느 가을날을 꼽을 것이다. 그리 길게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날보다 처참한 기분은 느낀 적이 없었다.
그 날은 웬 일인지 네가 하루 종일 방글거리며 웃고 다녔었다. 웃고 있는 네 얼굴은 귀여웠지만 하루 종일 웃고 있으니 아무리 귀여워도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이와이즈미도 마찬가지였는지 결국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으며 물었다.
-너… 드디어 미친 거냐?
-이와쨩. 그게 여자애한테 할 소리야?
-토오루. 기분 좋은 일 있어? 왜 그렇게 계속 웃고 다녀?
-아, 스가쨩, 이와쨩. 놀라지 말고 들어.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이야기 하려는 양 너는 뜸을 들였다. 곧 양 팔을 활짝 벌린 네가 큰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서프라이즈! 오이카와씨 남친 생겼지요!
너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내 속도 모른 채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쁘게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배구부의 우시지마 와카토시 알지? 어제 나한테 고백했어.
-… 그 녀석은 네가 뭐가 좋아서…
-오이카와씨는 이 타고난 미모에 남자들이 좋아하는 애교도 잘 부려서 인기 많답니다-. 이와쨩 같은 평범남은 그런 느낌 평생 모르겠지?
깐죽거리며 말을 이은 너는 결국 이와이즈미에게 양 볼을 꼬집혔다. 꼬집히면서도 부러우면 솔직하게 말하라고 깐죽거리던 너는 안 맞았을 딱밤까지 한 대 더 맞았다.
너와 이와이즈미가 투닥거리는 사이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의 도시락 반찬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매운 맛 마파두부였다. 아침에 도시락을 챙겨주던 엄마가 오늘 마파두부 엄청 맛있다며 챙겨주던 기억이 생생하게 났었다. 그러나 그 때 만큼은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벌레를 씹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그 날 도시락을 다 먹지 못했다.
그 날은 부 활동 휴일인지라 같은 부의 동급생과 선배들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졌다. 가방을 멘 채로 천천히 걷던 내 눈엔 앞서 걷고 있는 아사히가 들어온다. 나는 그대로 가볍게 뛰어가서 아사히를 불렀다.
-아사히!
-아, 스가구나.
-이제 뭐 할거야?
-글쎄, 집에 갈까도 생각했는데 역시 이 시간에 가긴 좀 아깝네.
-그럼 라멘 먹으러 갈래? 내가 살게.
내 말에 아사히는 조금 놀란 눈으로 날 봤다. 그러다 피식 웃고는 그럼 요전번에 tv에 나왔던 맛집에 가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와이즈미를 포함한 축구부 애들이 근처에 유명한 라멘 맛집이 있다며 몰려가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아사히의 말에 좋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같이 걸음을 떼었다.
-주문하신 라멘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문을 하곤 아사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앉아있으니 곧 라멘이 나왔다. 좋아하는 돈코츠 라멘이 테이블에 놓이자 아사히는 재빨리 젓가락을 쪼갰다. 내가 주문한 매운맛 라멘도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라멘의 냄새에 아사히가 재채기를 했다.
-괜찮겠어, 스가? 네 거 냄새만 맡아도 엄청 매운데…
나는 아사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있던 매운 맛 소스를 집어들었다. 그대로 내가 라멘에 소스를 치는 것을 본 아사히가 기함을 했다. 나는 말없이 젓가락을 쪼개 라멘을 먹었다.
라멘은 아주 매웠다. 그러고 보니 이와이즈미가 이 가게의 매운 맛 라멘이 엄청 매워서 부원 중 몇이 엉엉 울어댔다고 했던 것도 같다. 이와이즈미의 말대로 라멘은 아주 매웠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스가?
-여기 맛있다 아사히. 다음에는 다이치랑도 오자.
걱정스레 내 이름을 부르는 아사히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보이며 입을 떼었다. 아사히도 따라 살짝 웃어보이곤 라멘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몇 입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놓았다. 목이 메서 더 먹을 수 없었다.
어릴 때의 나는 키가 아주 작고, 너는 키가 아주 컸다. 그래서 너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사실이 못내 분했었다. 너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되면 너에게 고백을 하고 싶었다. 너를 지켜주고 싶었다. 너보다 키가 크고 지켜줄 수 있게 된 지금은, 너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